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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Mirrors, Mists,and Murmurs Toward an Asian American Thealogy아시아계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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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5-23 18:11 조회1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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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 Mirrors, Mists,and Murmurs Toward an Asian American Thealogy

                                  아시아계 미국인의 여신학을 향한 거울, 안개, 그리고 중얼거림

 

카미노미치Kami no michi, 일본에서 ‘신도’라고 불리는 ‘신들의 길’에 대한 이야기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Amaterasu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인 수사노오Susanowo는 바다와 지하세계의 신인데, 그는 여동생이 가진 생명을 부여하는 엄청난 힘을 전복하려고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보다 낮은 단계의 신이었고, 죽은 어머니의 땅으로부터 추방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분노하여 자신의 대변을 뿌려서 아마테라스의 신성한 직조장을 더럽히고 아마테라스의 관개 수로를 파괴함으로써 그녀의 세계를 모독한다.

이에 아마테라스는 고토다마(kotodama, 말에 깃든 영적인 힘)를 중얼거렸다. 선한 의도와 너그러움을 담은 고토다마로 속삭이며, 그의 사악한 행위를 다른 의미로 해석해주며 선의를 베풀고자 한다. 그녀는 자비로웠지만 그의 파괴적인 행동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그는 망아지의 가죽을 벗겨서 그 사체를 직조방 안으로 던져 여러 명의 신성한 직조공들을 죽게 만들었다. 아마테라스는 분노에 차서 침묵하고 은둔을 계속하는 동안, 밤, 겨울, 잠의 안개가 땅 위로 내려앉는다. 태양의 여신이 천상의 동굴로 도망가 문을 잠그고 잠적하고, 세상은 끝없는 겨울 속에 빠진다.

천상의 신들의 간청과 닭의 울음소리도 그녀를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하지 못한다. 신들은 수사노오를 그들의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벌을 내린다. 그리고 신들은 동굴 입구에 있는 나무에 거울을 걸어둔다. 근처에서는 여신 아마테라스가 샤머니즘적 영적 트랜스(trance)을 준비하며, 떠들썩하고 음란한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는 만물이 잠든 겨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파티이다. 아마테라스는 이 소음에 당황한다. 호기심에 찬 그녀가 동굴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서 있을 때, 신들은 동굴로 돌아가는 길을 밧줄로 막는다.

거울은 신도에서 가장 신성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장식이 아름답고 이미지를 정확히 비추는 전설적인 거울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어머니에게서 딸에게 전해지는 소중한 유산으로 여겨졌다. 좋은 거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고, 그것이 발산하는 빛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이 지혜는 자기 인식과 지식에서 나온다. 진실한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침묵의 동굴에 갇히게 된다.1

이 나라에서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의 역사는 침묵의 동굴로 강제로 후퇴한 역사이다.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신학아카데미 전당에서 도망쳤다. 남성중심의 활동으로 인해 아시아계 미국여성의 정체성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산산이 부서진 채, 깨진 거울만을 남겼다. 나오미 사우스워드Naomi Southard와 나는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을 위한 여신학적 ‘터전’이 부재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2 우리는 신학교 생활을 대부분 혼자서 해왔기 때문에, 우리가 배운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거나, 우리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신학적theological 거울의 부재함에 대해서 그저 조용히, 거의 대부분은 스스로에게만 속삭이는 등, 소외감과 고립 속에서 사적으로 고군분투해왔다.

우리는 여신학적 관심에 따라 실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신학을 글로 쓰는 데 있어 소외되어 있다. 종종 교회와 지역 사회에서 유일한 여성 목사이며, 때로는 유일한 아시아계 미국인이기도 하다. 소외, 고립, 단절 속에서도 우리는 정의, 온전한 관계, 고통, 치유, 평화를 향한 신학적 관심사를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종종 갈등하고 파편화된 삶의 경험들을 통합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우리의 신학적 작업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우리 자매들에게 접근할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는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의 다양한 정통 신학의 목소리들은 우리를 눈에 띄게 하거나 발언하도록 이끌어내지도 못했다.3

1978년 첫 모임에서, 사역하는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이전에 말도 제대로 못하고 종종 외로웠던 우리들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되는 신학을 찾는 여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사역을 활기차게 할 수 있는 신학에 대한 탐구를 갈망했다.4 우리가 처음 말을 할 때 우리들은 스스로 놀랐다. 왜냐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시아계 미국여성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만들고자 노력하면서 더 명확한 이미지를 찾고 있었다. 비록 우리가 수 마일에 걸쳐 흩어져 살면서 외로운 보석처럼 살고 있었지만, 그 공동체는 우리를 가장 진실하게 비춰줄 거울이 되기를 바랐었다.

침묵의 동굴에서 나오려면 우리는 산발적으로만 존재하는 공동체에서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을 찾아야 했다. 그 여성그룹의 일원으로서 나도 신학교와 대학원에서 배운 신학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각각이 나를 인종, 성별, 언어, 문화의 안개 뒤로 흐릿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시아계 미국여성의 신학을 말로 표현해야하는 과제에 대해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5 나오미 사우스하드와 내가 썼듯이, 아시아계 미국여성은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일신교를 추구하며, 삶의 신성한 차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허용하고... [그리고] 아시아 종교에서의 신성한 존재와 다시 연결되도록 해주는 아시아문화의 한 단면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신학적 개방성을 추구한다."6

이 글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의 여신학적thealogical 관점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안개 속에서 솟아오르며, 정체성의 거울mirrors of identity로서 맥락과 특수성을 포용하고 긍정한다. 또한 관계와 공동체를 향한 영적 갈망-즉 속삭임의 말murmurs of speech을 수용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나의 생각은 많은 아시아계 미국여성들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경험과 여신학적 탐구에서 나온다.

나는 중국 유교와 인도불교의 영향을 받은 문화의 하나인 일본 출신으로,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나라이다. 나는 또한 어머니가 일본인이고, 나의 출생국과 모국어가 일본인이이다.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푸에르토리코계이다. 나의 어머니는 미군 점령 하에 있던 수만 명의 일본 여성들처럼 백인 미군과 결혼했고, 우리 가족은 내가 여섯 살 때 오키나와에서 이주했다. 나는 일본계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일본태생의 미국시민을 부르는 ‘잇세’(Issei)이고, 절반은 비일본인이기에 ‘핫파’(Happa)이다. 나는 모든 아시아계 미국여성을 대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침묵 속에서 ‘말하기를 시작함으로써’ 우리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말을 꺼내기 시작한 것뿐이다.

 

고통, 공동체, 치유의 여신학(thealogy)

 

나는 자매들과 함께 인종차별, 성차별, 경제적 착취, 배타적 민족주의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투쟁에 힘을 실어줄 여신학을 창조하기 위한 거울을 찾는다.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여신학을 창조하려는 탐구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모든 세계, 즉 문화적, 정치적 복잡성 속에서 우리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신성한 이미지와 영적 깊이를 추구한다.

여신학에서 ‘고난’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강인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가부장적으로 고난을 대신 짊어지는,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에서 말하는 순교(martyrdom)가 아니며, 우리의 영혼과 인격의 향상을 위해 피학증적으로 고난을 견디는 것도 아니다. 신에 대한 전통적 의존. 고통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정당하게 거부되어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을 포용하고 인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고통이란 파괴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모든 창조물의 고통이다.7

고통 받는 세계와의 이러한 연대는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말하는 온정주의적인 구조 작업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지 자각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치유와 해방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연대해서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붙잡아주고, 또 지지함으로써, 그들의 힘과 우리들의 힘을 함께 북돋워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을 받아들일 때, 그 구체적인 인식을 통해 드러나는 분노와 슬픔은 타인과의 지지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고통을 포용하지 못하면 사랑도, 친밀함도, 지혜도, 자비도 없다. 슬픔과 치유 경험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어야 하고, 또 고통 받은 모든 사람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대속적 죽음이나 자기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어떻게 고통을 끌어안는지, 또 다른 사람과 함께 고통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연대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십자가와 해방에 관한 우리의 언어는 서양적으로 들리지만, 우리의 말은 다른 정서적 기반이 깔려있다.

고통에 대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접근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점을 서구 기독교에서 대승 불교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은 고통의 의미에 대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독특한 신학적 기여를 드러낸다. 불교는 말한다. 불교 신자들은 고통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험한 고통이 고통임을 직면하고 인정하며, 그 고통을 자비롭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고통을 치유하려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불교신자 조안나 메이시Joanna Macy는 저서 『핵시대의 절망과 개인의 힘 Despair and Personal Power in the Nuclear Age』에서 사랑하고, 희망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우리 자신의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모든 고통을 비정상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간주하는 미국문화 속에서는 부정적인 흐름이 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진실을 말해 주는 거울이 없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자신감은 미국인 성격의 특징이자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움과 고통을 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인내심이 부족하다거나 무능력의 표현으로 보일 수 있다....,8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거나, 죄책감을 느끼거나, 비애국적이거나, 의심하거나, 무력하거나, 당황하거나, 너무 감정적이거나, 실패자처럼 보일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메이시에 따르면, 우리 자신의 고통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부인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소외된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된다. 즉자기 회의에 시달리며, 쾌락주의적 또는 강박적인 도피displacement 행동에 빠지고, 수동적이고, 우리의 고통을 타인에게 심리적으로 투사하고, 파괴된 행동을 하게 되고, 탈진하거나 지적 무감각에 빠지며, 고통스러운 정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고통 대신 이러한 방식들을 선택하지만, “종종 그 고통을 헤쳐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치유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 누구도 [세상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마치 텅 빈 공간에 혼자서 존재하거나 스스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듯이. 이 고통은 상호 연결된 열린 시스템 속에서 우리를 통해 전달되는 물질, 에너지 및 정보의 흐름과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서로 연결된 열린 시스템으로 우리를 지탱한다.9 불교도는 이 고통 받고 신음하는 우주 전체의 고통을 끌어안으려 한다.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생명을 주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끊고는 행위이며,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이시(Macy)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의 이 급진적인 상호의존성은 종족으로서 인간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거치면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그것은 생명과 다른 모든 존재와의 상호 연결이다. 우리는 각기 분리된 개별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살아있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피부 바깥까지 뻗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전체와 본질적으로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10

불교도들은 윤리적 행동의 핵심으로 강렬한 내면의 자기 인식에 집중해왔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조화라는 더 큰 미학적 맥락에서 연민과 지혜를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러한 불교적 기반이 아시아계 미국 여성들의 신학적 사유에 흐르고 있으며, 이것이 서구 기독교에 귀중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면 서구 기독교는 치료적, 미적, 윤리적인 관심을 각기 분리된 영역으로 나누어 경쟁하거나 단절된 방식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의 여신학적thealogical 관심 속에 흐르는 불교적 기반을 지적하면서 나는 불교 역시 가부장적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자체로 여성혐오적인 태도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교는 개인의 내적 영역과 우주적 영역 사이에 위치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분석에 약하다. 이러한 사회 분석의 부족은 공동체에 대한 불교의 담론을 모호하게 하거나 권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불교는 흔히 고통의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즉, 여성이나 아동 학대, 빈곤처럼 발생하는 고통과 예방 가능한 고통, 그리고 죽음처럼 삶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고통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11 사회적 분석이 부족하기에 고통에 대한 불교적 언어는 운명론적이고 체념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아시아계 미국문화 안에서 그것은 일본어의 ‘시카타 가나이’(shikata ganai 어쩔 수 없습니다) 개념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표현은 불의와 억압의 국면에서 중얼거리는 단념의 언어이다.

불교와 기독교 모두, 인간 조건에 대한 분석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감정과 정서를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경향성이다. 인간의 열정(친밀감, 분노, 애정, 감정적 고통)은 이들 종교의 분석 안에서 제대로 통합되지 않는다. 대신에 이들은 흔히 육체와 함께 거부당하며 정신과 의지보다 몸이 하위로 간주되었다. 이런 결핍의 지점에서, 페미니즘은 매우 강력한 분석틀을 제시한다. 특히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이론을 통합하고, 감정과 몸에 대한 집중을 통해 그렇게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불교가 무시해온 ‘중간지대’,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적, 대인적 영역을 중시한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핵심이 억압, 탄압, 제도화된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해 왔다12.

그들의 작업은 가부장제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심리 내부 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결국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앨리스 밀러(Alice Miller)는 억압과 폭력의 생산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의 감정, 특히 고통을 억누르고 투사하도록 가르쳐, 대규모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힘과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심리적인 억제는 사회적 억압이 된다.13

우리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억압이나 고통에 감정이입(vicarious identification)하는 것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감정입하고 모든 이들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짊어지는, 모든 사람의 대의를 떠맡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우리가 우리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게 만든다. 바바라 데밍Barbara Deming과 오드리 로드Audre Lorde14는 사랑과 분노를 통해 자신의 열정의 뿌리를 탐구하면서 타인에 대한 부당함에 불의에 분노를 느끼는 것, 즉 데밍Deming이 "분노를 비유적으로 표현함(anger by analogy)”, 또는 다른 사람의 분노에 감정이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이런 자기의 정의감에서 비롯된 분노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고통의 힘과 직면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고통 속에는 우리를 치유하는 지혜와 연민으로 이끄는 자기 인식의 힘이 있다. 우리 삶의 진실을 보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온전해지거나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외로움과 고통에 대한 우리의 ‘쓴 말 하기’(speaking bitterness)의 여정 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통과 외로움의 부드러운 속삭임을 들어주는 자매들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 자신들의 고통을 말하고, 우리 자신을 비추어주는 거울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러한 거울 역할을 모든 고통을 껴안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우리 자신을 비춰주는 자매들의 공동체에서 비통함을 말하고, 우리는 이러한 반영을 모든 고통을 포용하는 방법으로 이해한다. 세상의 고통과 함께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를 ‘모든 창조물의 공동체’라는 인식으로 이끈다. 그러나 고통을 인정할 때, 나는 그 중심을 십자가의 고통이 아닌, 공동체 중심의 고통, 즉 모든 생명의 전지구적 공동체에 둔다. 세상과 함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를 ‘모든 창조물의 공동체’라는 인식으로 이끈다.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은 공동체의 유대가 아무리 약해졌더라도 그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다른 미국인들보다 더 큰 세계적 의식, 종종 멀리 떨어진 세계와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현실을 안고 살기 때문에 다른 많은 미국인보다 더 큰 글로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인종차별 사회에 의해 이러한 인식이 우리에게 강요되지만 이는 힘을 제공한다. 우리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더 넓은 연관 관계들을 보고 , 그 연관성을 파괴하는 편협한 민족주의(nationalism)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심오한 통찰력으로 이러한 공동체 의식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내 몸의 모든 세포는 고대인과 대화한다. 나는 태초부터 있었던 모든 믿음(신앙)의 움직임을 내 몸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영향을 모두 느낄 수 있다.15 글로벌 공동체를 긍정하는 아시아계 미국 여신학을 향한 길을 만들기 위해, 나는 나의 연결망에 대해 뿌리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장소를 찾아본다.... 나는 이념적 순수성을 기준으로 출처를 검토하지 않고, 기독교와 이교도, 서양과 동양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 접근 방식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아시아계 미국여성들과의 인터뷰에서, 나오미 사우사드(Naomi Southard)와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종교에서 영적인 자원을 개인적으로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종종 금지된 땅을 밟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말했지만, 거기에서 자신에게 힘과 진실성을 주는 내면의 영적 자원을 찾아냈다. 우리 중 일부는 여성 중심의 활동과 영적 깊이를 지닌 아시아 종교의 샤머니즘적 자원을 ‘자기 이해’와 ‘영적 이해’를 위한 자원으로 활용한다.

로버트 엘우드(Robert Ellwood)는 일본의 가부장제가 등장하면서, 초기의 평등주의적 샤머니즘 종교와 수평적 세계관이 남성 중심의 성직자 종교와 수직적 세계관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16 엘우드는 많은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이 직관적으로 느낀 바를 이론화한다. 즉, 우리 영성은 고대 샤머니즘적 뿌리 속에서 육화된 경험을 확실하게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여성 사제들은 내면에서 영혼의 존재를 느꼈고, 그 영은 그녀들을 통해 직접 지혜를 전하고 친밀하게 이야기했다.

반면, 남성중심 종교에서는 신들이 주로 남성이고, 이들은 사제들에게 계시의 꿈속에서 ‘말하는’ 존재로 등장할 뿐, 그들을 ‘통해 말하지’ 않는다. 그 영들은 그렇게 되면 영과 육의 친밀성, 지혜와 감정, 인간과 자연 사이의 깊은 연결은 사라진다. 그 영은 그녀들을 통해 직접 남성 지배로의 전환은 주로 남성인 신들의 승천과 하강을 포함하며, 그들은 계시하는 꿈속에서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이야기한다.

샤머니즘은 하나님을 멀리 있고, 냉담하고, 징벌적이며, 소외된 존재로 보는 신학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 토착 아시아영성은 초월적 아버지의 신학(theology)이 아니라 육화된 영적 여신학a thealogy of the incarnate spirit이다. 나의 치유적인 육화된 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를 다른 존재들과 연결시키고 고무시키는 유대감을 보편적 추상이나 교리에서 찾기보다, 내가 살아 움직이고 구체적이고, 복합적이며, 다양한 세계에 대한 나의 사랑을 통해 발견한다.

영spirit의 구현은 영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자연 세계는 우리 삶의 뿌리이다. 강, 바다, 나무, 꽃, 새, 동물, 풍부하고 때로는 압도적으로 무서운 힘을 지닌 대지의 힘과 감각적 쾌락과 기쁨이 담긴 인간의 몸, 이 모든 자연세계는 우리의 삶의 뿌리이자 영이 우리와 접촉하는 통로이다. 샤머니즘적 치유의 황홀경(trance)은 감정, 사고, 감각의 통합을 통해 영이 드러나는 과정이다.17 트랜스는 우리가 교리와 믿음의 인지적 측면에만 집중할 때,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을 만나게 해준다. 이러한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리는 생명을 주고, 힘을 실어주고, 활력을 주고,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영을 발견하며, 그것은 온 창조세계와 우리를 연결해 준다.

넬 모튼(Nelle Morton)도 유사한 치유적 트렌스 상태를 설명한다. 그녀는 여신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환영을 경험하고, 어머니가 그녀에게 치유와 힘을 주는 말을 해준다. 이 환시는 그녀 안으로 스며들며, 그녀를 온전히 만든다. 우리 자신의 이러한 가장 깊은 내면을 탐색하는 것은 통제권을 내려놓고, 명확한 목적이나 최종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모튼이 은유의 여정에 대해 설명하듯, 그 여정의 끝은 미리 정해질 수 없다.18

통제하지 않고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자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사랑과 연결의 씨앗을 발견하는 여정을 포함한다. 아시아계 미국여성이 아시아영성의 문화적 자원을 탐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낭만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리가 무속의례를 찾고자 할 때, 이 고대 전통들이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전승되고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주의를 주고 싶다.

우리의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미묘하거나 노골적인 여성혐오와 여성공포(gynophobia)의 이면에 숨겨진 우리 여성 조상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가부장제가 침묵시켜 온 것에 대해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 을 갖는 것이다. 이 가부장적 가면은 아마테라스 전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전설에는 토착 여성사제와 영을 숭배하는 문화를 억누르고 봉건적 황실 혈통을 정당화하려는 변명을 담고 있다.19 본래 겨울 동지를 축하하는 축제였을 지도 모룰 이야기가 정치적 권력 장악을 위한 행사로 바뀌었다. 이 전설은 남성이 지배하는 제국 궁전에서 여신의 부재를 정당화한다. 태양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휴식은 남성의 공격성 앞에서의 침묵으로 바뀌는데, 유순한 아시아 여성들에게 기대되는 반응이 되었다.

우리는 신학이라는 환대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침묵하고 후퇴하는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영적인 말을 말할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치유를 갈망하며 가슴속에서 나오는 온화하고 관대한 말, 즉 고토다마kotodama를 계속해서 속삭이면서, 우리는 비통함 또한 말해야 한다. 왜냐면 오직 고통에 대한 완전한 자기 인식과 그 고통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에만 우리는 연민을 가지고 모든 창조 공동체를 위한 치유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들의 속삭임은 우리를 지탱해 주었고 우리 자신의 고통과 기쁨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이상화하지 않는 거울을 찾을 수 있는 이 지점까지 우리를 이끌어주었다. 우리가 각자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억압과 사랑의 층위에는 명확하거나 쉬운 적도 없고, 신이 정해준 편side도 없다. 우리 자신의 삶과 모든 창조 공동체를 치유하고자 할 때,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오직 끈질긴 회복력, 정직함, 관대함, 그리고 희망뿐이다.

 

*저자: Rita Nakashima Brock

미주리주 컬럼비아에 있는 스티븐스칼리지의 여성학과장이며, the Disciples Peace Fellowship의 회장. 

최근 Crossroad에서 출판된 Journeys By Heart: A Christology of Erotic Power의 저자.

 

*출처: Judith Plaskow, Carol P. Christ(1989), Weaving the WisionWeaving the Visions: New Patterns in Feminist Spirituality, San Francisco : Harper & Row, pp.23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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