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불교: 불의에 저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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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4-15 20:24 조회16회 댓글0건본문
베트남 불교, 불의에 저항하다
- 베트남: 중국인으로부터 '월남(越南)'이라고 일컬어지며 한(漢)시대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음
-베트남의 종교: 무술(巫術)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간 신앙을 있지만, 중국으로부터 불교·유교·도교 등이 수입됨.
-불교의 등장: 6, 7세기경에 들어와서 뒤에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풍 대승불교가 성행.
19세기 이후 프랑스 식민지 정책 아래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진출하게 되고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독립과 남북 베트남으
로의 분열, 이에 따른 국내전쟁으로 불교 세력은 차차 쇠퇴해가는 경향이 있었고, 더욱이 남베트남 공산화와 이에 따른 남
북 베트남 공산정권의 통일로 인해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음.
하지만 아직도 80%가 불교도로서 다수를 점하고 있음.
-틱광특스님: 베트남 최고위 고승으로, 소신공양
7살에 출가, 포교와 사찰 재건에 힘쓰며 남베트남 불교계의 주요 인물
당시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였는데, 불교 탄압과 독재 정치에 맞서서 저항하던 승려들을 무차별 진압하거나 강제로 가톨릭
으로 개종시키기도 함,
1963년 5월 8일 부처님오신날(베삭 데이) 축하 행사를 막고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자 발생.
틱꽝득스님은 이에 맞서 1963년 6월 11일, 67세(법랍 47년)에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를 하던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소신공양을 감행
“내가 눈을 감아 부처님의 곁으로 가기 전에,
조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국민들에게 박애와 자비를 베풀고
종교 평등 정책을 실행하기를 응오딘지엠 대통령께 정중히 간청드립니다.
모든 덕 높으신 비구, 비구니, 부처님의 자손들이여,
그대들이 결속하고 희생하여 불교를 지키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불교인구의 증가
:1차적으로 베트남불교의 투쟁이 그의 소신공양으로 승리,
2차적으로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투쟁'이 베트남전쟁 승리로 성공,
3차적으로 그런 베트남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종교의 탄압이 약해져 베트남의 종교 인구 증가
-베트남불교 현황
: 베트남 종교국에 따르면, 베트남불교총회에는 4개의 불교대학 운영.
베트남승가회는 전국 35개의 강원과 50여 개의 불교기초학교를 보유.
2022년까지 약 2700명의 비구가 졸업 했고, 2195명의 비구가 수련 중.
교육 내용은 전국적으로 통일된 내전 및 외전 텍스트로 구성된 32권의 교과서 중심.
-베트남불교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
: 베트남불교가 줄곧 중생, 곧 인민의 편에 서고자 노력해 왔기 때문.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정권과 독립투쟁을 할 때 불교사원은 독립투사들의 양성소이자 피난처 역할을 했고,
남북 베트남의 분열 상황에서도 불교 신앙 안에서는 하나가 되었다.
국가 통일 이후에는 사찰들이 국민의 재교육 공간으로 활용됨.
*베트남 비구니승단
-남성 출가자보다 여성 출가자가 10배 가량 많은 정도로 비구니 승가 위상이 매우 높음.
-베트남 불교에는 대승불교, 상좌부 불교, 걸사파의 세 종파가 있고, 세 종파 모두 각자의 전통에 따라 비구니 공동체를
갖고 있지만, 세 종파의 비구니승가는 모두 ‘전국 비구니 승가’로 통합됨
-가장 이른 시기 베트남 비구니승가가 형성된 종파는 '대승불교파'로, 약 2세기에 형성됨.
20세기 들어 베트남에 불교 근대화 운동으로 베트남불교협회가 창립, 비구니 스님들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짐
-'테라와다불교파'는 비구니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1992년 비구니사원 건립하고 뛰어난 5명의 여성출가자가 스리랑카로
건너가 비구니계를 수지함.
비록 베트남불교승가회가 테라와다 비구니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은 여성출가자를 위한 사원을 세우고
아이들과 성인을 위한 명상과정을 개발하며 수행정진하고 있음.
-'걸사파'는 1946년 민당 꽝 선사가 창시한 지역 종파로 대승불교와 테라와다를 혼합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종파에는 뛰어난 비구니 스님들이 많이 배출돼 베트남불교승가회에서도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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