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에 나타난 재가자의 위상과 신행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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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4-07 20:30 조회90회 댓글0건본문
초기경전에 나타난 재가자의 위상과 신행생활
1. 재가자의 의미
석가모니 붓다의 제자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출가자이고 다음으로는 재가자이다. 다시 출가한 남성인 비구(bhikkhu)와 여성인 비구니(bhikkhun沖)로 출가자를 구분하고, 재가자로서는 남성은 우바새, 여성은 우바이로 나누는데 이들을 합하여 흔히 사부대중(四部大衆: catta?i parisa?이라 한다.
여기서 우바새(優婆塞)는 우빠사까(Upa?aka)에 대한 음역으로 오파색가(烏波索迦), 우파사가(優波娑迦) 등으로도 음역되며 다시 이것을 근사(近事)·근사남(近事男)·근선남(近善男)·신사(信士)·신남(信男)·청신사(淸信士)라 의역되고 있다. 우바이(優婆夷)는 우빠시까(Upa?ika?에 대한 음역으로서 우파사(優婆斯)·오파사가(휂婆斯迦)로 그리고 근사녀(近事女)·근선녀(近善女)·근숙녀(近宿女)·신녀(信女)·청신녀(淸信女)로 의역되었다. 이들을 각각 재가의 남녀로서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하는 사람을 이름하는 말이다. 한 경전은 재가불자, 즉 “우바새란 집에 머물며 청정한 삶을 살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삼보에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이에 저를 증명하고 알아주십시요’라고 맹서한 사람이다.”2)라고 표현하고 있다.2) 《잡아함경》 제33권 : “優婆塞者. 在家淨住. 乃至盡壽. 歸依三寶. 爲優婆塞. 證知我.”
율장(律藏) 등에 의하면 아직 교단이 성립되기전 불(佛)·법(法) 이보(二寶)에 귀의한 최초의 재가불자는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로서 이들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 공양을 올린 대상(隊商)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삼보(三寶)에 귀의한 재가불자는 야사(Yasa)의 부모이다. 각각 이들은 최초의 우바새와 우바이가 되었으며 야사 또한 우바새였다가 최초로 출가비구가 된 경우이다.
불교도가 된다는 것은 출가이든 재가이든 기본적으로 모두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오계(五戒)를 수지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특히 재가의 경우 최소한 삼보에 귀의가 먼저 요구되고 그리고 오계의 수지까지를 그 범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3)3) 대표적인 한 예를 든다면, A.(PTS의 An?uttara-nika?a) vol. IV, pp. 220∼222.
이러한 오계가 확립된 사람에게는 다시 몇 가지 계율을 더 부가한 팔재계(八齋戒)가 주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아함경》의 《우바새경(優婆塞經)》4)은 그 경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가불자를 위한 기본 가르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경은 많은 경전에 산재해 있는 재가자에 대한 기본적인 교설의 요점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경전인데, 재가자는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제자’로 언급되면서 오법(五法)과 사증상심(四增上心)을 실천할 것이 설해진다.
오법은 오계를 지켜 실천하는 것을 말하고 사증상심이란 네 가지 뛰어난 마음을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서 삼보의 염(念: anussati)에 계(戒)의 염이 더한 것이다. 여기서 삼보의 염이란 다름 아닌 불·법·승의 성질과 가치 그리고 덕성 등을 깊이 되새겨 내면화하는 행법을 말한다. 일종의 관상법(觀想法)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 중심의 종교가 입으로 신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불러 기도하고 숭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불보(佛寶)에 있어서 “여래는 세존(世尊)이시며, 아라한(阿羅漢)이시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시며(正遍知), 지혜와 덕행을 잘 갖추신 분이시며(明行足), 잘 가신 분이시며(善逝),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시며(世間解), 위없는 분이시며(無上士), 인간을 잘 이끄시는 분이시며(調御丈夫), 신들과 인간들의 스승이시며(天人師), 깨달으신 분(佛世尊)입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불보를 수식하고 나타내는 각각의 말에 대한 의미와 가치 그리고 성질을 되새겨보는 것이다. 법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불법이야말로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 잘 설하신 가르침이며, 현생(現生)에서 바로 (결과를) 볼 수 있는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해 있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고 검증해 보라고 할 수 있는 가르침이며, 목적하는 바대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가르침이며, 지혜로운 이라면 각자가 성취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으로 역시 불법의 특징과 가치 그리고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승보에 대해서는 승보야말로 “세상에서 잘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올바르게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지혜롭게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바른 방법으로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네 쌍의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이룬, 여덟 부류의 성스러운 수행자들의 모임이며, 이것이 실로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으로 공양을 올릴 가치가 있고 대접할 가치가 있으며, 보시를 드릴 가치가 있고 예경을 올릴 가치가 있는,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공덕의 복밭(福田)”이라고 하는 것을 되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계증상심은 오계 등의 불교의 윤리 도덕적인 실천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재가자는 이와 같은 오법과 사증상심을 통해 선(善)하지 않는 세계를 다하고 예류과(預流果)를 얻어 끝내는 괴로움의 끝과 정각(正覺)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2. 재가자의 출신성분
현존하는 초기경전에서 출가자를 포함하여 재가자의 출신성분을 분석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에 따르면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재가자는 농촌보다는 도시에 주로 거주한 도시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 의해 불교를 ‘도시형의 종교’라고 결론짓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계급이나 계층에 있어서는 하층민보다는 상층이 압도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경전에서 언급되는 재가자의 유형은 왕과 왕족, 촌장, 대신과 귀족, 지방 관리, 장군, 바라문 사제나 교리학자, 수학자, 의사, 고급 유녀(遊女), 지주, 거상(巨商), 대상(隊商), 고리대금업자 등과 같이 다양하며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상층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반면에 이발사, 농부, 코끼리 조련사, 옹기장이, 금속 세공업자나 범죄인 또는 거지들과 같이 하층의 사람들도 나타난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 불교로 귀의한 재가자는 왕에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이 가운데 거상(巨商)이나 대상(隊商)과 같은 무역업에 종사하는 많은 상인 계층은 불교 교단의 발전에 있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회적·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3. 수승한 재가자
《증일아함경》 제3권 〈청신사품(淸信士品)〉과 〈청신녀품(淸信女品)〉에 대응되는 빠알리(Pa?i) 《앙굿따라 니까야(An?uttara Nika?a)》5)를 보면 불설(佛說)로서 당시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남녀 재가제자들을 출가제자와 똑같이 성문제자(聲聞弟子: sava?a)로 칭하면서 나열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5) A. vol. I, pp.25∼26.
〈청신사품〉
나의 우바새(優婆塞)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처음으로 법락(法樂)을 성취하고 성현의 진리를 깨달은 이는 삼과(三果)의 대상(隊商)이며 지혜 제일인 질다(質多) 장자가 바로 그요, 신통력(神德) 제일은 바로 건제아람(ㅦ提阿藍)이요, 외도를 항복 받는 이는 바로 굴다(堀多) 장자요, 깊은 법을 잘 설명하는 이는 바로 우파굴(優波掘) 장자요, 늘 앉아 참선하는 이는 바로 가치아라바(呵侈阿羅婆)요, 악마 세계를 항복받는 이는 바로 용건(勇健) 장자요, 복과 덕을 많이 가진 이는 바로 사리(륉利) 장자요, 큰 시주(施主)는 바로 수닷타(須達) 장자요, 일가 친척이 많은 이는 바로 민토(泯兎) 장자이다.
나의 우바새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이치 묻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생루바라문(生漏婆羅門)이요, 성품이 지혜롭고 밝은 이는 바로 범마유(梵摩喩)요, 모든 부처님에 대해 깊은 신심을 내는 이는 바로 어마마납(御馬摩納)이요, 몸 가운데 무아(無我)의 이치를 생각하는 이는 바로 희문금(喜聞芩) 바라문이요, 이론으로 이길 수 없는 이는 바로 비구(毘㈊) 바라문이요, 게송을 잘 짓는 이는 바로 우파알리(優婆離) 장자요, 말을 빨리 잘하는 이는 바로 우파알리 장자이다.
좋은 보배를 기꺼이 내어주어 아끼는 마음이 없는 이는 바로 수제(殊提) 장자요, 선(善)의 근본을 이룩한 이는 바로 우가비사리(優迦毘舍離)요, 묘한 법을 잘 설명하는 이는 바로 최상무외(最上無畏) 우바새요, 주장에 두려움이 없고 사람의 성질을 잘 살피는 이는 바로 두마대장영비사리(頭摩大將領毘舍離)이다.
나의 제자 우바새 가운데 첫째로서, 은혜로이 베풀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빔비사라왕(毘沙王)이요, 적게 보시하는 이는 바로 광명왕(光明王)이요, 선(善)의 근본을 이룩한 이는 파세나 왕이요, 뿌리 없는 좋은 믿음을 얻어 기뻐한 이는 바로 아자타사투왕(阿륉世王)이요,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해 뜻이 변하지 않는 이는 바로 우다야나왕(優塡王)이요, 바른 법을 받들어 섬기는 이는 바로 월광왕자(月光王子)이니라.
성스러운 중을 받들어 공양하되 뜻이 언제나 평등한 이는 바로 제타왕자(造祇園王子)요, 항상 남 건지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이는 바로 사자왕자(師子王子)요, 남을 잘 공경히 받들되 높고 낮음이 없는 이는 바로 무외왕자(無畏王子)요, 얼굴이 단정하여 남보다 뛰어난 이는 바로 계두왕자(鷄頭王子)이다.
나의 우바새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불니(不尼) 장자요, 마음으로 항상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바로 석가 종족 마하납(摩訶納)이요, 항상 기뻐하는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석가 종족 발타(拔陀)요, 항상 보호하는 마음을 써서 착한 행을 잃지 않는 이는 바로 비사선(毘륉先) 우바새요, 욕됨을 잘 참는 이는 바로 사자(師子) 대장이니라.
여러 가지로 잘 논하는 이는 바로 비사어(毘舍御) 우바새요, 성현의 침묵을 잘 행하는 이는 바로 난제바라(難提波羅) 우바새요, 착한 행을 부지런히 잘 닦아 쉬지 않는 이는 바로 우다라(優多羅) 우바새요, 내 제자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깨달은 이는 바로 구이나마라(拘夷那摩羅)이다.
〈청신녀품〉
나의 우바이(優婆夷)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처음으로 도를 잘 깨달은 이는 바로 난타타바라(難陀陀婆羅) 우바이요, 지혜가 제일가는 이는 바로 쿠주타라(久籌多羅) 우바이요, 언제나 좌선하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수피야녀(須毘那女) 우바이요, 지혜가 밝은 이는 바로 비부(鼻浮) 우바이요, 설법을 잘하는 이는 앙갈사(鴦竭륉) 우바이요, 경전 뜻을 잘 연설하는 이는 바로 발타바라수염마(跋陀婆羅須焰摩) 우바이요, 외도를 항복 받는 이는 바로 바수타(婆須陀) 우바이요, 음성이 맑고 트인 이는 바로 무우(無優) 우바이요, 여러 가지로 논하는 데는 바로 바라타 우바이요, 용맹스레 정진하는 이는 바로 수두 우바이이다.
나의 우바이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여래를 공양하는 이는 바로 말리카(摩利) 부인이요, 바른 법을 받들어 섬기는 이는 바로 수뢰바(須賴婆) 부인이요, 성스러운 중들을 공양하는 이는 바로 사미(捨彌) 부인이요, 미래와 과거의 어진 선비를 우러러 보는 이는 바로 월광(月光) 부인이요, 보시하기에 으뜸인 이는 바로 뇌전(雷電) 부인이요, 항상 자애의 삼매를 행하는 이는 바로 마하광(摩訶光) 우바이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비제(毘提) 우바이요, 기뻐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 이는 바로 발제(拔提) 우바이요, 착한 행동을 지키어 선업을 보호하는 이는 바로 난다(難陀)의 어머니인 우바이요, 믿음의 해탈을 얻는 이는 조요(照曜) 우바이이다.
나의 우바이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항상 욕됨을 참는 이는 바로 무우(無優) 우바이요, 공삼매(空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비수선(毘얽先) 우바이요,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우나타(優那陀) 우바이요, 무원삼매(無願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무구(無垢) 우바이요,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이는 시리(尸利) 부인인 우바이요, 계율을 잘 가지는 이는 앙갈마(鴦竭摩) 우바이이다.
얼굴이 단정한 이는 바로 뇌염(雷焰) 우바이요, 모든 감각 기관이 고요한 이는 바로 최승(最勝) 우바이요, 많이 듣고 널리 아는 이는 바로 니라(泥羅) 우바이요, 게송을 잘 짓는 이는 바로 수달(須達)의 딸 수마가제(修摩迦提) 우바이요, 겁내지 않는 이도 바로 수달의 딸이요, 내 성문가운데서 최후에 깨달은 우바이는 바로 람(藍) 우바이이다.
위의 양 경전을 비교·검토해보면 기본적으로 재가 불자의 위상과 역할 등이 종합적으로 잘 요약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간단히 정리하면, 먼저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출가자에게 공양드리는 재시자(財施者)로부터 시작하여 사무량심(四無量心)이나 사섭법(四攝法)과 같은 이타행의 실천자, 성묵(聖默)을 잘 행하고 좌선을 통해 선정(禪定)을 닦는 선정수행자 그리고 깊고 묘한 법을 잘 이해하고 설하는 설법자(說法者), 더 나아가 주장에 두려움이 없고 논쟁으로 남을 이길 수 있는 논사(論師)는 물론 그렇기에 외도(外道)까지 조복받고 불교로 귀의시키는 포교사(布敎師) 역할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우바새로서 가장 이상적인 재가불자의 대표로 ?따와 핫타까(Hatthaka)를 우바이로는 쿠줏따라(Khujjuttara? 또한 벨루칸타끼야가 언급되고 있다.6) ?따는 설법사(dhammakathika)로 나타나고7) 쿠줏따라는 또한 여러 경전에서 언급되지만8) 특히 폭넓은 불교에 대한 이해(bahussuta) 면에서는 우바이 가운데 최고로 언급된다.9) 벨루칸타끼야는 많은 비구들이 찬사를 보내는 우바이로서 사리불이 그녀에게 법을 설하기도 한다.10) 여기서 최고의 이상적인 재가불자로 불법을 깊이 이해하고 있거나 설법사의 역할로서 이야기된다는 점은 불교가 법을 중시하는 지혜의 종교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겠다.6) A. vol. I, p. 26, p. 88; vol. II, 164. 7) A. vol. I, p. 26. 8) A. vol. I, p. 88; vol. II, 164; vol. IV, 368; S.(PTS의 Sam?utta-nika?a) vol. II, 236. 9) A. vol. I, p. 26. 10) A. vol. IV, p. 64 ff.
4. 재가자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어디까지인가
한번은 유행하는 바차고타(Vacchagotta)라는 한 외도가 부처님을 만나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흰 옷 입은 재가자11) 가운데 얼마만큼이나 범행을 닦아(梵行者: brahmaca?i) 오하분결(五下分結)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11) 여기서 재가자를 흰 옷 입은 사람(gih沖oda?a vasana?으로 표현한 것은 출가자가 착용하였던 당시 분소의(糞掃衣)나 염색한 승복(kasa?a vasana?에 대비되는 염색하지 않은 당시 일반인들의 의복을 뜻한다.
이 물음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 보다도 훨씬 많은 재가자들이 범행을 닦아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비구·비구니에 이어 같은 형식으로 재가불자에게도 해당하는 질의 응답인데, 여기서 분명히 불설(佛說)에 의해 많은 수의 재가 불자들이 범행을 닦고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어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opapa?ika?’가 되었다는 의미는 수행에 따른 좀 더 고양된 인격으로 순간순간 변화하는 정신적 재탄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재가자도 열반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음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조건과 단서가 있는데 이는 바차고타의 다음 질문에서 대비적으로 잘 드러난다.
“당신은 이렇게 범행자로서 많은 수의 비구·비구니는 물론 흰 옷 입은 재가불교인까지 열반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흰 옷 입은 제자 가운데 욕락자(欲樂者: ka?abhog沖)로서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녀 해태(懈怠)하지 않고 의심을 떠나 의혹을 끊고 확신하여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바차고타여,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 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흰 옷 입은 제자 가운데에서도 욕락과 함께 나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녀 해태(懈怠)하지 않고 의심을 떠나 의혹을 끊고 확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12)12) M.(PTS의 Majjhima-nika?a) vol. I, p. 498 ff.
이처럼 과연 재가자들이 아라한과 증득이 가능한가에 대한 중요한 문답이 담겨 있는 이 경은 《마즈히마 니까야(Majjhima Nika?a)》의 《마하바차고타 숫타(Maha?Vacchagotta Sutta)》라는 경전이다. 한역 대응 경전은 《잡아함경》 제34권의 《출가경(出家經)》인데 여기서는 사문사과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열반의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은 범행을 닦는 자(梵行者: brahmaca?沖)로서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어야 가능하다는 언급에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욕애(欲愛: ka?a)를 벗어나지 못하는 흰 옷의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닌다 하더라도 해태(懈怠)하지 않고 의심을 떠나 확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정도이지 아라한의 열반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재가자라 할지라도 출가자 못지 않게 열반의 아라한과를 성취하려면 범행을 닦는 자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이는 다시 바차고타와 대론하는 또 다른 경에서 ‘재가자로서 속세의 결(結)을 끊지 못하면 고(苦)를 끊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13)13) M. vol. I, p. 483.
그리고 여기서 꼭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궁극적인 경지로서의 목표는 분명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과이고 그 내용에 있어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그 성취하는 과정까지 결코 모두 같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출가의 중요성이 강조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재가자의 조건은 출가자보다 열반 성취에 있어 훨씬 힘들다는 것이다. 즉 욕애를 벗어나기 훨씬 힘든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초기불교에서는 출가라는 조건이 강조된다.
5. 재가자의 열반 성취는 가능한가14)14) 과연 재가자가 열반의 경지에 이른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불교 교리사에서 오랫동안의 쟁점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기서는 그 구체적인 논의를 생략한다.
불설로서 재가자라 할지라도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 보다도 훨씬 많은 수라고 나타난다. 여기서 잠깐 열반의 아라한과 경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불교도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경지이고 궁극적인 목적의 경지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아라한은 일체 번뇌를 소멸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라한 가운데 한 분이며 그러기에 여래 십호의 처음에 위치하여 강조된다. 더 나아가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초기경전에서 보여주는 근본적인 의미의 불타관(佛陀觀: 붓다의 개념)은 아라한관(阿羅漢觀: 아라한 개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15) 15) 졸고, “A Study of The Concept of Buddha”: A Critical Study Based on the Pa?i Texts, Delhi : 델리대 박사학위논문. 1999.
그러기에 초기경전에서 아라한과 이상의 불과(佛果)가 따로 설정되어 설명되지 않았다. 다만 아라한과와 불과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초기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불교 흥기 이후 한참이 지난 이후부터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재가자가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재가자로서 열반 성취의 예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야사(Yasa)는 재가자 신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아라한과를 성취한 인물이며 그 이후 출가하였다.16) 마가다국의 왕비, 케마(Khema? 또한 마찬가지로 재가자로서 아라한과를 증득한 후 출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처님의 세속 부친인 정반왕도 임종 바로 직전에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잡아함경》의 《아지라경(阿支羅經)》17)에 따르면 아지라는 붓다와의 대론에서 연기에 대한 설법을 듣고 법 눈이 깨끗해져 “저는 이미 제도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는 우바새가 되려니 증명하고 알아주십시요”라고 재가불교도가 될 것임을 맹서하고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소에 받히는 사고로 말미암아 죽고 말았다. 이를 보고하는 비구들은 그의 후생을 묻는데, 이에 대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이미 법을 보고 법을 알고 법에 머물러 법을 받지 않고 이미 반열반에 들었다.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그 몸을 공양하라”18)고 설한다. 16) Vinaya-pit.aka vol. I, pp.15∼20. 17) 《잡아함경》 권12. 18) “彼已見法·知法·次法·不受於法. 已般涅槃. 汝等當往供養其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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