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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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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10-20 09:13 조회2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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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의 형이상학

 

홍창성

 

<초록>

불성의 전통적 개념은 극복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직면한다. 필자는 그런 개념적 어려움을 극복하면서도 불성의 개념을 여전히 불교 수행과 통합하기 위해 불성을 2차 지시어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불성은 고정불변의 자성을 가진 실체거나 실체가 아니다. 불성이 실체면 집합체거나 단순체이다. 집합체면 기체와 속성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가 되어 실재하지않는 허구다. 단순체면 기체거나 단순 속성이다. 기체의 존재는 철학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불성이 단순 속성이면 신체의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특정할 수 없다. 설혹 그런 시공간이 존재하더라도 불성은 계속되는 시공의 부분들이 모인 4차원적 전체를 형성하여 허구가 된다. 그렇다고 불성이 찰나마다 생멸한다고 보면 고정불변하다는 불성의 정의에 어긋난다.

불성이 공과 동일하다면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런데 불성이 실제로 공과 동일할까? 동일하거나 별개라면 둘 다 실재하는 독립적 존재, 즉 실체여야 한다. 그러나 공을 실체로 보면 패러독스에 빠진다. 공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불성에 자성이 비어있다고 하면 어떨까? 그런데 불성이 공하다면 불성일 수 없다. 또 불성이 공하지 않다면 변화를 가져올 수 없어 불성에 의한 깨달음이 불가능하여 불성이 아니게된다. 공하든 공하지 않든, 불성은 그 존재가 부정된다. 한편, 실체로서의 불성은 조건에 의해 성립할 수 없고 스스로부터 나올 수도 없다. 무시 이래로 존재해 왔다고 볼 수도 없다. 불성은 실체가 아니다.

 

불성이 실재하지 않아도 불성은 가명 또는 지시어의 형태로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펜인데, 우리는 색깔과 재질, 모양, 크기, 그리고 무게가 다양한 펜을 각각 편리하게 모두 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며 사용한다. 물리적으로 다른 기계장치도 그것이 화학에너지를 물리에너지로 변환시키면 하나하나 모두 엔진으로 지칭된다. 보통명사 엔진같은 것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경우마다 다른 사물을 가리키는 편리한 지시어다. 이때 존재하는 것은 구체적인 펜이나 엔진이지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추상적 대상이 아니다.

 

어느 한 유정물이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심신의 특정 상태가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불성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경우마다 다른, 깨달음을 이루기에 적절한 몸과 마음의 상태를 그때그때마다 편리하게 가리키는 지시어로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지칭되는 불성은 모든 유정물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자성을 가진 실체일 수 없다. 각각의 유정물에 따라 그 상태가 다를 것이고, 또 한 유정물에서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상태가 끊임없이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명으로 이해된 불성은 실체로서의 불성이 가진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우면서 우리 일상과 수행의 현장에 두루 존재한다.

 

<차례>

I. 불성은 실체로서 실재하는가?

II. 불성의 개념이 가지는 논리적 문제

III. 불성과 연기 그리고 공()

IV. 편리한 도구로서의 2차 지시어

V. 2차 지시어로서의 불성

 

 

 

출처: 불교학연구 (Korea Journal of Buddhist Studies) 제84호 (2025.9) pp. 367∼39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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