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생명윤리: 불살생의 계율과 동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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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10-21 15:08 조회296회 댓글0건본문
불교와 생명윤리: 불살생의 계율과 동물권
1. 머리말
우리 시대 생명은 위태롭다.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기후 위기로 인한 산불로 사람과 짐승, 초목을 가리지 않고 무참히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생명들이 내쉬는 마지막 숨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멈추고 더 이상 순환하지 못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 행복하라’는 명제는 불교의 생명관을 상징한다. 경전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생명들을 모두 아우르면서 그 생명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평가하는 구절들이 자리하고 있다. 생명이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유한성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일을 강조하면서도, 그 생명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 또한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가 생명의 종교라는 평가는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곳곳에서 다양한 이유로 살생(殺生)이 저질러지고 있는 시대에 생명의 종교인 불교가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를 물으면 쉽게 긍정적인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닭의 형태는 없어지고 갖가지 형태로 튀겨진 치킨이 코를 유혹하는 기름 냄새를 풍기며 집마다 돌아다니고, 온갖 영상물에서는 너무 많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는 영상들이 넘쳐난다. 잡식성 동물에 속하는 우리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유전자에 새겨진 습(習)이 되었다.
모든 음식이 다 그렇듯이 육식(肉食)도 일정한 중독성을 지닌다. 고기를 점점 더 많이 먹게 된 우리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대형 사육시설을 갖추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지어진 공장식 축사 주변은 일 년 내내 악취를 풍기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을 강요한다. 전원주택을 지어 시골로 이사한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선 축사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일도 드물지 않다. 시골에서 집마다 한두 마리씩 소나 돼지를 키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연적인 정화가 가능한 범위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장식 축사는 그 범위를 훌쩍 넘어서며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현대인’이 빚어내는 악순환의 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제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이 지니는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가 되었다.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이 계율은 우선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묻게 만든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인공지능이 일상으로까지 들어왔고, 이 기계들은 인간과 유사한 외모를 하거나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어느 순간에는 옆에 있는 인공지능이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그것이 프로그램된 알고리듬에 따라서 생명을 무감각하게 해치는 기계가 될 수도 있다. 현대과학을 이끌어 온 것이 국방과학과 기술임을 감안하면, 전쟁터에서 사람의 목숨을 정확하게 끊어놓는 데 더없이 유능한 인공지능 저격수의 등장은 피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은 새로운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로 인한 산불과 홍수 등으로 사라지는 생명들과 전쟁으로 인해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는 생명들, 실험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철저히 수단화되어 활용되다가 사라지는 생명까지 이 시대 살생은 늘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서곤 한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알고 보라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를 강조하는 불교는 이런 대학살의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먼저 불살생의 계율이 이 시대 상황에서 지닐 수 있는 의미를 새기는 일에서 출발할 수 있다.
2. 불살생의 계율을 다시 생각한다.
사미들이 말했다. “우리의 계율은 어느 만큼인가? 우리는 그것들을 어디서 배워야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사미들에게 열 가지 계율을 허용한다. 첫째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둘째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며, 셋째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삼가고, 넷째 거짓말하는 것을 삼가고, 다섯째 곡주나 과일주 같은 취기 있는 음료를 마시는 것을 삼가며, 여섯째 때아닌 때에 먹는 것을 삼가라……”
불살생의 계율은 사미들에게 주는 열 가지 계율 중에서 맨 먼저 나오는 계율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다른 계율들을 이끄는 위상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라는 이 계율을 받아 지키기 시작하면서 수행승으로서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로도 새길 수 있다. 주지 않는 것을 빼앗거나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삼가는 것도 불살생계를 지키는 보다 강렬한 노력을 통해 형성된 계율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이후의 계율들도 마찬가지다.
재가자들에게 부여되는 계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직 수행승들만을 대상으로 설해진 계율을 소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재가자들이 지키기에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따로 재가계를 설하겠다고 밝힌 후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 것을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에 동의해서도 안 된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폭력을 두려워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또 어디에 있든 제자라면 그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 빼앗거나 빼앗는 것에 동의해서도 안 된다. 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취해서는 안 된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청정하지 못한 행위를 삼가라. 만일 청정을 닦을 수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 ……
생명을 해치지 말라.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 순결하지 못한 성적 교섭을 하지 말라. 밤에는 때아닌 때의 음식을 먹지 말라. 화환을 걸치지 말고 향수를 쓰지 말라. 깔개를 깐 바닥이나 침상에서 자라. 이것이야말로 여덟 고리 계행의 포살이다.
재가자들에게 부여되는 여덟 가지 계율 가운데서도 불살생계는 첫 번째 계율이지만, 그 내용이 한층 더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 스스로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을 시켜서 죽이거나 죽이는 것에 동의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에 더하여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식물까지도 폭력을 두려워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에 눈길이 간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폭력을 두려워하는 동물과 식물 모두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이 계율은 계율 적용의 대상이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불교 생명윤리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불교 생명윤리는 불교윤리의 하위 영역의 하나이면서 생명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 핵심이기도 하다. 생명복제와 임신중절, 안락사 문제 등에 관한 불교적 관점을 찾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불교 생명윤리는 경전의 방대함과 그로 인한 해석의 여지 사이의 대립을 피하기 쉽지 않은 난제를 지니고 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불교학자들 스스로 이런 윤리적 논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경전의 건조한 해석 뒤로 숨거나, 불교학의 본령이 아니라는 이유 등을 대면서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을 넘어 통탄의 마음까지 일게 할 정도이다.
불교윤리는 우리 삶과 사회에서 제기되는 모든 윤리적 쟁점을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기준으로 분석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결과 모두를 포함하는 윤리학의 한 영역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경장의 다양한 내용들과 율장의 구체화된 계율 형태로 주어져 있고, 그것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불교윤리학자들의 과업은 단순히 어느 불교학파에 집중하는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겁다. 그러나 다양한 윤리적 쟁점들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21세기 사회를 살아가는 가운데 이런 과업들을 기꺼이 껴안고자 하는 학자들이 없다면, 우리는 기껏 외국의 논의를 수입해 소개하는 소매상 노릇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불교학계의 상황은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물론 외국의 최근 논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아는 일은 이 시대 학자가 공유해야 하는 범위일 것이지만, 우리의 도덕적 환경 속에서 그것들을 재해석할 뿐만 아니라 우리 고유의 불교 전통을 토대로 새로운 논의의 장을 세계 학계에 보여주어야 하는 의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불교 생명윤리에 관한 논의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학자를 둘만 꼽는다면 데미언 키온(D. Keown)과 피터 싱어(P. Singer)가 있다. 이 둘은 각각 영국과 호주를 배경으로 윤리학 공부를 하면서 공리주의 윤리설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중에서도 불교 자체에 관한 공부를 중심에 둔 사람은 키온이다. 그는 불교윤리를 공리주의 윤리학과 비교하면서 새롭게 해석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윤리가 계율을 중시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해소하거나 행복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하고자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윤리는 공리주의와 유사하면서도 공리주의와 동일하지 않고, 각 행위 주체의 덕성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그 결과에도 주목하기 때문에 덕윤리와 동일한 것일 수도 없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키온은 불교가 의료윤리나 생명윤리와 같은 최근의 윤리적 쟁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왔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그 배경을 각 개인의 깨달음에 집중하면서 출가자의 위상을 주로 재가자들에게 계율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정도에서 한정하는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응용윤리적 쟁점들에 대한 답을 공리주의와 의무론, 덕윤리 정도의 서양 윤리학 전통에서만 찾는 일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로 인해 다양한 도덕 전통들이 서로 만날 기회가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불교윤리와 유교윤리 같은 동아시아 전통의 윤리설에 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는 인식은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싱어의 경우는 공리주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불교윤리가 갖고 있는 생명 존중의 전통과 같은 지점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최근 불교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대만 비구니이자 불교윤리학자이기도 한 쉬 차오훼이와의 의미 있는 대담을 통해, 불교와 공리주의를 배경으로 고통의 세계화에 맞서는 실천적 대안들을 함께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불교윤리에서 계율이 차지하는 비중을 중시하면서도, 현대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맞는 적극적인 재해석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불교윤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윤리적 영역에 도입해 해석하는 것을 중심축으로 삼지만, 그 가르침이 율장의 것으로 한정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교윤리에서 계율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불교윤리의 중심은 여전히 계율이다.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불살생의 계율 또한 모든 계율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해석과 적용 범위를 인간에서 동물, 식물로까지 확장할 수 있는 포괄성과 포용성을 지닌 계율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 계율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고통을 중심에 두고 재해석하는 일과 그 재해석을 토대로 일상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두 차원의 과제 모두 버거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고통을 가해 오는 현상의 심각성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3. ‘폭력을 두려워하는 존재’로서 동물과 식물
가) 동물권과 ‘동물해방’
현대 윤리학에서 동물권에 관한 관심은 피터 싱어가 동물해방을 윤리적 실천 과제로 들고나오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공장식 축사의 동물들과 실험동물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고발하면서 모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도덕적 배려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고통, 두려움, 분노, 사랑, 기쁨, 놀람, 성적 흥분 및 그 외 다른 많은 정서 상태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본적인 몸짓은 인간 종에서만 살펴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 아니다. ‘아파’라는 언어 표현은 말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하나의 증거가 될 수는 있지만 유일한 증거는 아니다. 사람들은 간혹 거짓말을 하고 로봇도 ‘아프다’라는 말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가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1975년에 《동물해방》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피터 싱어의 대표작은 그 후 윤리학계를 넘어 많은 실천가의 관심은 물론 육식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데도 일정하게 성공했다. 물론 실제로 소비하는 고기의 양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인간과 같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동물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의사표현 방식을 활용해서 고통을 포함하는 많은 자신의 정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어진 셈이다. 만약 있다면 그는 짐짓 모르는 체하는 것일 뿐이다.
싱어는 이런 태도를 종차별주의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비판하고자 했고, 그것은 다시 단지 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 부도덕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어떤 존재자이든지 고통을 겪고 있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이런 싱어의 주장을 동물의 세계에까지 확장하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다. 이미 반려견이나 반려묘의 경우에는 어떤 측면에서는 이 지구상의 어떤 부류의 인간들보다 더 많은 공감과 배려를 받고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와 같은 대륙에서 여전히 많은 수의 어린이가 최소한의 보살핌도 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지만, 아파트 아래층 반려견은 고급 음식은 물론 아프면 은 비용을 지급해 가면서도 동물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싱어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도덕적 주체와 도덕적 배려의 대상이라는 분리된 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이나 동물이 모두 고통을 느낄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덜어주는 데 나서야 하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인간뿐이다. 다시 말해서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 인간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문제 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불교 생명윤리의 관점에서도 모든 생명의 동등한 소중함을 전제로 하면서, 그 소중함을 보존해 줄 수 있는 주체로서 인간의 특별한 위상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또한 실천적인 관점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인정해 줄 필요도 있다.
그런데 불교 생명윤리는 앞에서 살펴본 재가자의 첫 번째 계율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폭력에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라는 요건과 함께, 그것이 동물에 그치지 않고 식물까지 확장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폭력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으려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런 후에는 그에 상응하는 반응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극과 반응은 러시아의 심리학자 파블로프(I. Pavlov)의 개 실험 이후로 행동주의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자극이 들어오면 반응할 수 있는 능력과 기능을 갖추고 있는 대상만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자극과 반응 능력은 물론 다양한 수준으로 나뉠 수 있고, 인간의 경우는 그것을 인식하고 언어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그렇지만 이 수준은 상당한 부분 상대적일 수 있고, 도덕적 고려의 대상만을 생각할 때는 동물 수준의 자극반응으로도 충분하다.
동물권은 폭력을 비롯한 자극에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의 기능과 역량을 기반으로 주어질 수 있는 동물의 권리이다. 불교에서 특히 강조하는 폭력은 힘에 근거한 것이고, 그 힘은 다시 실제적으로 가해지는 것과 가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잠재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다. 이런 힘이 느껴지면 그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권리가 생기고, 침해당했을 경우에는 다양한 형태의 보상과 함께 그 가해자에 대한 처벌까지 법에 보장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동물보호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고, 실제 판례를 통해서도 동물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이 처벌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 법에서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 체계가 발달한 척추동물’이며, 각각 포유류와 조류는 물론 일부 파충류와 양서류, 어류도 포함한다.
동물해방은 동물권과 연계성을 지니는 개념이지만, 보다 적극적인 동물의 삶을 보장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은 해방 상태에 있지 않고, 실험실의 동물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공장식 축사에서 사육되는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윤리적 관점에서 동물해방은 이러한 근원적 고통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걸림돌을 제거해 주는 것을 의미하고, 특히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진화의 역사 속에서 길들여진 가축을 자연으로 무조건 돌려보내는 일이 동물해방일 수는 없다. 오히려 폭력의 위협에 더 노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짐승에게 당할 수 있는 위험과 함께 자연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다치거나 죽어가는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 식물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계율에서는 분명히 식물도 폭력으로 인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불교의 식물관은 최근까지 식물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육식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채식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불교계에도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혼란을 가져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불교에서 식물은 여러 중생의 양태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삼계 중 욕계(欲界)에 존재하는 여섯 가지 윤회하는 존재에는 속하지 않는다. 지옥에서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에 이르는 육도윤회(六道輪回)의 주체 중에는 식물이 없다. 그럼에도 식물은 주로 씨앗의 형태를 통해 번식하고 물과 햇빛, 거름을 토대로 생존하는 중생의 하나임을 부정할 길은 없다.
이런 식물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일은 최근 식물치료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왜곡된 심리를 치료할 목적으로 식물을 함부로 부수고 자르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도 이어진다. 만약 식물도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면, 또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자격을 갖고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동물권에서 이어지는 우리 논의의 맥락에 따르면, 고통을 느끼거나 최소한 폭력으로 인한 두려움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식물에 대한 인간의 편견을 문제 삼는 이연수에 따르면, 인간은 식물이 움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각력도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길게 잡아서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카메라가 만들어지면서 식물이 움직인다는 사실이 경험적으로 밝혀졌다. 더 나아가 식물에 어떤 자극을 가했을 때 미세하지만 반응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역시 경험적인 검증이 끝난 상황이다. 그것을 의인화하여 서술하면 ‘폭력을 두려워하는’이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다. 시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은유인 ‘풀잎처럼 눕다’라는 표현이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방향에 몸을 내맡기고 누웠다가 금세 몸을 일으키는 풀잎의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해진 셈이다.
채식의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육식보다 채식을 권장하는 불교 전통은 대체로 두 가지 근거에서 정당화가 가능하다. 하나는 동물보다 식물이 느끼는 고통이 덜 직접적일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첫 번째 근거와 연결되면서 식물의 섭취가 인간에게 덜 공격적인 성향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논의 과정에서는 현재까지 우리가 식물의 고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양이라는 것이 질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고려 사항을 염두에 두고서도 우리의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식물이 느끼는 고통이 동물의 그것과 비교해서는 덜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가진 것들이 느끼는 폭력으로 인한 두려움의 차원이 불교 생명윤리의 중심축임을 감안하여 채식 문제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어떤 것이라도 열량을 낼 수 있는 것들을 음식으로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우리 인간을 비롯한 중생들이 공유하고 있는 고통은 먹임을 당하는 그 생명체가 느끼는 고통을 온전히 배제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하면 그 고통의 양을 줄이는 것이고, 그 맥락에서 채식은 충분히 검증된 고통 경감의 먹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먹기 전에 우리에게 몸을 내어주는 식물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필요가 있고, 그런 고마움의 표시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타자의 생명체를 먹어야만 비로소 생존이 보장되는 우리 인간의 존재 실상에 관한 인식의 계기를 부여해 줄 수 있다.
식물윤리를 말하고자 하는 이연수는 그것을 보다 포괄적인 생명 존중에 기반한 새로운 윤리 영역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물이 능동적인 생명체로 이미 자극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음이 밝혀진 이상 최소한 우리가 식물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게 된 가장 중요한 근거는 그 동물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의 인식 및 인정이고, 이제는 그 범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자극에 반응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식물까지로 넓혀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한 정당화 근거를 지닌다. 남은 과제는 어떻게 현실 속에서 그 포괄적인 생명 존중의 윤리를 실현하는가이고, 그 방안 중의 하나로 이미 역사적 차원과 경험의 차원에서 검증된 불교의 채식문화 확산을 꼽을 수 있다. 고기를 먹거나 채소를 먹을 때 모두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계기를 만들 수 있고, 따라서 공양게를 암송하면서 먹는 과정은 그 자체로 철학함을 토대로 하는 실천 영역으로 들어설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4. 불교의 생명관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
가) 호모 인드라네티우스(Homo Indranetius)의 요청
20세기 이후 서구문명권이 지배한 이후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주류는 개인(個人, individual)이다. 고립성과 이기성을 전제로 혼자서 살아가면서 타인을 비롯한 타자 모두와 자신이 필요한 경우에만 수단적 관계를 맺는다는 계약론적 관점도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개체적 인간은 경제적 소유권과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핵심 가치로 삼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20세기에 특히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공산주의 실험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 21세기는 신자유주의와 함께 트럼프식의 특권적이고 선택적인 자국 중심 무역주의의 지배를 노골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중이다.
이런 배경에서 생명의 가치가 수단적 차원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좁은 의미의 진화론적 사유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왜곡된 해석과 수용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지배담론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후속작인 《확장된 표현형》에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일정한 노력이 담겨 있었지만, 인간은 이기적이고 따라서 드러내놓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도 더 나은 것이라는 윤리적 개인주의로까지 확장되어 우리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다.
모든 유전자가 세계에 퍼져나가는 영향 범위의 중심이듯이, 모든 표현 형질은 개체 몸 안팎에서 수많은 영향이 모이는 중심이다. ……생물권 전체, 동물과 식물의 세계 전체는 유전적 영향 범위라는 정교한 관계망, 표현형 힘이라는 그물망과 십자 모양으로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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