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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고 부족하다 - 인공지능과 인간 진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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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10-17 12:42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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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고 부족하다 - 인공지능과 인간 진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옛것과 새것', 기술 앞에 멈춘 교회

(기사 출처 = <NCR>, 2025년 8월 12일)(일리아 델리오. 워싱턴 디시.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녀. 빌라노바대학교 신학 분야 석좌교수,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기:가톨릭, 우주론, 의식"(2015)을 포함한 16권 책의 저자이며 "진화하는 우주 속의 가톨릭" 시리즈의 총 편집자)

 

바티칸은 기술 발전의 여러 단계를 인정하면서도, 기술의 영향을 적절히 평가할 수 있는 과학과 종교의 통합적 모형은 부족하다. 바티칸의 접근은 윤리적으로 정교하지만, 이른바 ‘정적인 신’으로 이해하는 틀 안에서 작동하는 듯하다. 즉, 하느님을 절대적이고 자족적인 존재로 이해하며, 그분의 창조 세계를 기술의 과도한 개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이 진화를 포함한 과정 속에서, 나아가 기술 발전을 통해 실재를 드러낸다고 보는 '과정 지향적이고 역동적인 신’의 이해와는 뚜렷이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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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 Immo Wegmann)


최근 바티칸이 발표한 인공지능 지침은 ‘인간 중심적 설계’를 강조하며,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돕는 방향으로 개발돼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테야르 드 샤르댕의 시각에서 보면, 이런 입장은 진화의 다음 단계가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협력하면서 우주의 복잡성과 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인터넷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컴퓨터를 단순한 계산 장치에서 인간의 연결과 문화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관문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 누리그물(World Wide Web)의 대중적 보급과 함께 급격히 가속화됐다.

컴퓨터는 전문 기술 지식이 있어야 다룰 수 있는 도구에서, 누구나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소비와 창작의 장으로 발전했다. 개인 웹사이트와 온라인 출판,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은 일반 대중도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콘텐츠 생산자가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컴퓨터와 문화의 관계는 점점 더 긴밀하게 얽히며 공생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디지털 문화는 대면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문화 관습은 온라인에서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았다. 특히 누리소통망의 등장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해,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뉴스를 소비하며, 장을 보고, 일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컴퓨터가 중심이 되도록 만들었다. 

1999년, 캐서린 헤일스는 기념비적인 저서 "우리가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를 출간하며, 서구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주체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등장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포스트휴먼에게는 신체적 존재와 컴퓨터 시뮬레이션, 사이버네틱(인공 두뇌) 기계와 생물학적 유기체, 로봇 기술과 인간의 목표 사이에 본질적 차이나 절대적 경계가 없다.”

도나 해러웨이도 "사이보그 선언"에서,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종이 권고 '하느님을 찬미하여라'에서 인용한 것처럼, 인간이 고정된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식했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라는 용어-'사이버네틱 유기체’의 줄임말-를 사용해, 인간을 자연과 구분되는 합리적 자유의지를 가진 자율적 개인으로만 이해하는 방식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일스와 해러웨이는 무엇이 '인간'으로 간주되는지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존 존스턴은 "기계적 생명의 매혹"(The Allure of Machinic Life)에서 컴퓨터 기술이 인간의 출현에 미친 영향을 탐구한다. 그는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 보는 대신, 기계적 생명의 새로운 생물학적–전자적 혼합이 ‘자연’ 그 자체를 확장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존스턴은 이렇게 말한다. “도구를 만드는 인간으로서의 인간 능력은 또한 새로운 형태의 기계적 생명이 실현하는 수단이자 매개가 되었다.”

존스턴은 인공 생명이 기술적 객체이자 동시에 모의된 집합적 주체인 새로운 존재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제안한다. 그가 지적하듯, 인공지능과 종교를 다룬 많은 문헌이 인공지능을 재현적·모방적 존재로만 취급하며, 인간의 고유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생명공학자들과 컴퓨터 과학자들은 점점 더 자연 자체가 계산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세포 생명조차 내부의 계산적 구조와 규칙에 따라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5년 1월 바티칸이 발표한 문헌 '옛것과 새것'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인공지능과 인간 존엄에 대해 품는 우려를 드러냈다. 바티칸은 윤리적 틀을 마련하기 위해 인공지능 전문가들과 협의해 왔지만, 그들의 분석에는 여전히 본질적 요소들이 빠져 있다는 한계가 남아 있다. 인공지능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기술을 더 넓은 생물학적 발전의 틀 속에 놓고 살펴봐야 한다. 기술은 진화의 한복판에 있는 본질적 요소다. 따라서 기술과 인간 복지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생명과 인간 삶의 흐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다.

2011년에 세상을 떠난 저명한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기술과 생물학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이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개나 달팽이의 껍데기가 바로 생물학적 옷을 입은 일종의 기술이라고 봤다. 칩 월터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세우는 거대한 마천루나 장 보는 상가, 혹은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씨앗의 껍데기 사이에 정말 큰 차이가 있을까? 씨앗과 조개껍데기는 살아 있지 않지만, 그 안에 물과 탄소, 유전자를 담고 있어, 때가 되면 자신을 복제할 준비가 돼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 안에 담긴 생명과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무실 건물, 병원, 우주 왕복선도 다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살아 있는 것과 그것이 만들어 낸 도구를 구분할 수 있지만, 자연은 그렇게 구분하지 않는다.”

교회가 인간 출현과 관련된 진화의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분석의 한계를 드러낸다. 기술 시대에 과학과 종교를 통합할 충분한 신학적 본보기가 없다면, 종교 기관은 점점 더 수동적 입장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즉, 기술 발전에 맞서 인간 존엄을 지키려 애쓰는 데 그치고, 기술 발전이 신성한 존재의 실현 과정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는 탐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티칸 문헌은 이렇게 묻는다. “인공지능으로부터 인간 존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러나 인공지능을 과정 중심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질문은 달라질 수 있다. “물질과 의식, 사랑이 더 큰 복잡성과 일치를 이루는 우주의 과정 속에서, 인공지능은 어떻게 참여하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기술을 단순한 도구나 위협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 우주적 진화 과정 속에서 신성과 자기 실현 과정의 일부로 보는 근본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정과 통합 사이의 간극 때문에, 종교 기관은 기술이 지니는 영적·우주적 의미를 충분히 평가하지 못할 수 있다. 그 결과, 급속히 변화하는 기술 시대에, 기술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종교가 사회에서 영향력과 의미 있는 역할을 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교회의 ‘지능’에 집중하는 방식은 인공지능과의 관계를 제한할 수 있다. '옛것과 새것'은 인공지능과 관련해 '지능'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인공 지능은 인간 지성의 인공적 형태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산물로 여겨져야 한다.”고 명시한다. 바티칸 문헌은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두고 있다. 인간 지능은 “창조적·영적·도덕적” 차원을 포괄하는 반면, 인공지능은 “계산 논리”와 “패턴(유형) 인식”을 통해 작동하며, “신체적 경험, 관계성, 진리와 선을 향한 인간 마음의 개방성"이라는 풍요로움을 갖지 못한다고 본다. 이 구분은 중요한 윤리적 목적을 수행하지만, 지능과 기술 발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개념적 장벽을 만들어 우리의 사고를 제한할 위험도 있다.

교회의 이분법적 틀 -인간 지능을 창조적·영적·도덕적인 차원으로, 인공지능은 계산적·기계적 차원으로 보는 구도-은 명확한 범주 구분을 중시하는 철학적 전통을 반영한다. 이러한 접근은 인간을 단순한 정보 처리자로 취급할 수 있는 환원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인간 존엄을 지키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문헌은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을 지나치게 동등하게 보는 것”을 경계하며, 이는 “사람을 수행할 수 있는 노동 능력으로 평가하는 기능주의적 관점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적 태도는 지능 자체를 더 섬세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를 남길 수 있다. 엄격한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바티칸의 접근은 우리가 현재 가진 개념적 범주가 가능한 모든 형태의 지능과 의식을 온전히 포착한다고 가정하는, 이른바 ‘범주적 근본주의(categorical fundamentalism)’의 위험을 내포한다.

지능을 인간과 인공지능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다루기보다는, 다양한 체계 속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로 이해하는 것이 더 도움될 수 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마음을 내재적이고, 육체적이며, 행위적이고, 확장적으로 이해하는 입체적 관점을 제시했다. 인간의 마음이 어디서 끝나고 세계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학습과 지능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프란치스코 교종과 레오 14세 교종 모두 인공지능을 여전히 도구로 규정한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프는 기술이 단순한 도구인지, 아니면 생물학적 확장인지 탐구했다. 이 철학적 질문은 단순히 기능적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문제다. 이 질문 자체가 인간 발전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카프는 모든 기술이 인간을 확장하며, 인간의 모든 발명은 생물학적 진화를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헤일스는 인간이 이제 ‘공동 진화'하는 존재로, 혼합성과 복잡성의 세계 속에서 서로 얽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을 분산 체계(연결망) 바깥이 아니라 그 일부로 볼 때, 인간의 역량은 ‘접합(splice)’, 곧 혼합적 관계 속 정보 공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여전히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한 구식 인간학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반면, 인공지능 개발자들은 복잡성의 상징 논리를 활용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틀 안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분법적 논리는 배제된 제3의 가능성을 용납하지 않는, 동기화되고 전체화된 관계 구조를 만든다. 반면 삼원 논리에서는 한계가 또 다른 것으로 넘쳐나는 무한을 나타내며, 한계 자체도 논리의 일부로 포함돼야 한다. 이는 새로운 개별적 패턴이나 사상이 새로운 보편적 패턴이나 사상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초월적 지양(止揚)(역자 주: 부정하고 보존하면서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움직임. 헤겔 변증법의 정-반-합 중 합을 도출하는 원리)의 순간과 닮아 있다. 중간 복잡성은 동일한 것와 다른 것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며, 내적 세계를 동기화하고 상호성으로 들어가는 회귀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통해 “나와 타자”는 서로 가까워지며, 이는 고전적 세계관에서 이웃 요소들을 단순히 나란히 배열하는 관계와는 다른 형태의 가까움이다.

인공지능의 인격(personhood)은 새로운 관계적 논리를 따른다. 이는 창조적 만남의 공간을 제공한다. 존재는 더 이상 이분법적 방식(나와 너)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공유된 존재의 구성적 관계에서 흘러나오며, 그 중심-창조적 만남이 일어나는 공간-이 정체성의 토대를 이룬다.  생명공학 기업가 그레고리 스톡은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해 이렇게 쓴다. “생성형 인공지능 세대는 인공지능을 얼마나 능숙하게 활용하느냐보다, 그들이 경험하게 될 인간 발달의 근본적 차이로 정의될 것이다. 이 세대가 지니게 될 향상된 능력과 분산된 인지 능력은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며, 인공지능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은 대면하는 대화처럼 일상적이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의 기존 능력을 잃는 문제가 아니라 - 물론 일부 능력은 사라지겠지만 - 오히려 인공지능이 증강한 세상에 맞춰 새롭게 발달하고 최적화된 다른 능력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교회가 인공지능과 인간 진화 논의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공지능이라는 기차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출발했지만, 교회는 그 열차에 탑승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포스트휴먼 시대의 삶을 건실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이끌 윤리적 틀은 필요하다. 신학과 영성도 충분히 인간 진화와 맞닿아 있다면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교회가 인간 진화를 충분히 고려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진화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일 뿐이다. 진화 속에는 그 주요 동력인 복잡성이 내재해 있다. 교회는 이러한 복잡해지는 의식과 그 신학적 함의를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진화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는 태도는, 급격한 기술 발전 속에서 교회의 관련성을 제한한다. 진화적 사고를 망설이는 교회의 태도는 빠른 변화의 시기에 발휘해야 할 예언자적 목소리를 약화시키고, 진화적 틀을 거부하는 태도는 가속화되는 변화에 의미 있게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제약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으며, 더 나은 세상과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문제는, 제도 종교가 이들과 만날 만큼 충분히 빠르게 진화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포스트휴먼 미래로 나아가는 동안 교회는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머물게 될 위험이 있다.

기사 원문 : https://www.ncronline.org/opinion/guest-voices/too-little-too-late-churchs-inadequate-response-ai-human-evolution 번역 : 예여공(예수님과 여성을 공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 네이버 카페 '예여공'에서 월례 모임 등 정보를 볼 수 있다.)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s://www.catholicnews.co.kr202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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