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3일, 모두를 잠 못 들게 했던 계엄 날 밤으로부터 약 한 달 하고도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정치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연일 터져나오는 ‘단독’ 보도에 맘 편히 쉴 날 없는 요즘이다. 언론의 취재로 사실 관계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이번 계엄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비상식적인 시도였는지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과 정권을 비판하는 모두를 소위 ‘종북 세력’으로 취급하며, 총과 칼이라는 폭력을 동원해 국민과 국회를 벌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당연하게도 여론이 악화되자, 부랴부랴 마련한 ‘경고성 계엄’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해명에 많은 이들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검찰이 낸 보도자료로 드러난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 중에는 국회에 진입한 군인들에게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폭력 그 자체였다. 폭력을 행사하며 경고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마치, 자식을 때리고 난 후 “잘되라고 회초리 든 것”이라고 합리화 하는 가부장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가부장 정치’의 장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계엄 사태를 대하는 여당 국회의원들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다. 국민을 대변하는 대표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충성과 항명 사이에서 고민하는 군인의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다. 국무위원들부터 국회의원들까지, 기성 정치인들은 대통령을 충성을 바쳐야 할 주군, 아버지로 여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들은 줄곧 충성해야 할 대상을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지켜야 할 국격을 국민의 체면이 아니라 대통령의 체면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가부장 정치’의 역사는 짧지 않다. ‘충효일치(忠孝一致)’라는 사상이 있다. 이는 ‘군주’를 확대된 가족의 ‘아버지’라고 해석하며 충과 효를 바칠 것을 요구하는 개념으로, 일본 제국주의 정신의 근간이었다. 일각에서 ‘국부’라고 부르는 이승만 대통령 역시 이 사상을 계승해 가부장의 정치를 이어갔고, 이는 ‘산업화로 국민을 먹여 살린 가부장’이라는 박정희 신화로까지 이어져 지금도 그 지지자들을 강하게 연결하는 세계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민주화로 독재의 시대가 지나가고 국민 주권의 시대가 온 지금도, 국민에게 충과 효를 바칠 것을 요구하는 ‘가부장 정치’의 그늘은 여전히 우리 정치 문화와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다. 민주화 운동으로 탄생한 87년 체제는 가부장 정치까지 극복하진 못한 것이다.

몇 가지 장면들이 금방 떠오른다. 여당 대표였던 한동훈 전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충성을 보였던 장면부터, 정치 지도자를 ‘아버지’에 비유하고 자신들은 ‘딸’이나 ‘아들’로 정체화하며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치 팬덤의 사례들까지, ‘가부장 정치’는 우리의 정치 문화 속에서 공고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가부장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년 남성 지도자의 존재 자체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순히, 남성 가부장이 아닌 여성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박근혜 대통령 역시 가부장의 정치를 계승했다. 그 역시 충과 효를 강조했고, 국가와 부모가 같다는 ‘충효일본’을 말했다. 박정희라는 아버지의 딸로서 물려받은 ‘가부장 정치’를 충실하게 이어간 것이다.
여전히 응원봉 불빛으로 가득한 광장에서는 이번 계엄 사태를 계기로 낡은 87년 체제를 끝내고, 개헌을 통해 제7공화국을 열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다양한 응원봉 불빛들처럼 제7공화국은 마땅히 다양한 목소리가 존중받을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극복되어야 하는 과제 역시 ‘가부장 정치’의 종식이다. ‘가부장’이 강력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가족 공동체를 ‘통솔’하는 식의 정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도 옳지도 않다. 광장이 그랬듯 정치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연대하며 꾸려가는 다정한 정치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이제 호통치고, 국민을 업신여기며, 혼자 지배하고 통솔하고자 하는 정치에 질렸다. 그런 정치, 그만 보고 싶다. 폭주하는 계엄으로 시작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과정은 반드시 가부장 정치의 탄핵, 권위주의의 탄핵과 함께 해야 한다. 윤석열이 물러난 자리에 조금 더 나은 가부장이 온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위해 타인을 탄압하며, 약자와 소수자가 배제된 ‘정상 가족’과 같은 ‘정상 국가’를 지향하는 리더의 반복적인 등장은 대한민국을 또 다시 권위주의의 참화 속으로 이끌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에 가부장 정치는 필요 없다고 외쳐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그늘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다. 구원의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이 아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고 연대하는 일을 해내자.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오늘이 가부장 정치가 가뒀던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해방시켜,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역사의 초석이 되었으면 한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이한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가
[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글: 김연웅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가 출처: 여성신문, 2025.01.16